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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친구 이야기

「갈릴레오의 밀실」


-1-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소설 같은 걸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따라서 과연 내가 이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서술자'다. 서술자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서술한다. 따라서 나도 내가 아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던 평범한 고등학생 5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섯 명은 항상 같이 다녔고, 가끔 그 다섯 명을 보면 '저런 게 우정이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고등학생 2학년이 되어 수학여행으로 산골 마을로 갈 때도 다섯 명은 항상 붙어 다녔다. 방 배정도 그 다섯 명 중 남자 3명이 한 방, 여자 2명이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게다가 남자가 아래층을, 여자가 위층을 쓰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남자 방 위에 바로 그 여자 방이 있었다. 결국 다섯 명이 한 방을 쓰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마 하루 종일 신 나게 놀고 너무 피곤해서 잠에 금방 빠져버린 수학여행 두 번째 밤이었을 것이다. 다섯 명이 깨어난 곳은 온통 하얀색인 방이었다. 입구도, 출구도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밀실이었다.


 나도 안다, 이런 패턴도 이제 진부한 이야기 패턴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거짓말 치는 걸 잘 못하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재능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나오는 전개도 아마 당신의 눈에는 어색해 보이거나 식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양해를 부탁한다.


 그러나 이런 식상한 클리셰도 실제 상황에서 경험하게 된다면 꽤 충격적이겠지. 그야, 현실과 소설은 전혀 다르니까. 나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그런 현실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다섯 명은 머리를 모으고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들은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너무 신 나게 놀았던 후라 눕자마자 깊은 잠에 푹 빠져버렸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흰 방에 천장에는 전등 하나가 온 방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방의 한 구석에는 어딘가 기분 나쁜 도구들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어디인가.


 자신들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여학생 유진이 말하길, 자신들이 어제 본 참새가 뱀에게 먹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기만 했기 때문에 천벌 받은 거라고 했다. 옆에 있던 남학생이자 학급의 회장인 진수는 그녀가 너무 순진하다며 좀 진지해져 보자고 말했다. 둘은 서로 이성 교제를 하는 사이이다.


 장난스럽게 생긴 남학생 유정은 한쪽에 쌓인 기분 나쁜 도구들을 하나 하나 집어보고 있었다. 가위, 자, 삼각자, 망치, 낫, 밧줄. 유정은 그들을 가둔 범인은 아마 학생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다. 확실히 그 도구 뭉치 속에는 학용품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보통 학생들은 망치나 낫을 들고 다니진 않잖아, 라며 옆에서 유정을 지켜보던 여학생 신지가 비꼬면서 말했다. 낫이나 망치를 든 학생은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띈다. 저 많은 도구들을 들고 다닌 학생이라면 자신들을 가두기 전에 이미 다른 누구에게 들켰을 게 뻔하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네 사람은 다시 생각의 벽에 가로 막혔다. 눈 앞에서 사방을 가로 막고 있는 하얀 벽은 그들을 점점 압도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그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리던데. 유정이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진수 역시 떨고 있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그러니 모두 그만 진정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안정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방은 여전히 막혀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한 가지 질문에 다다랐다.


 재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신발 아래에서 나는 철퍽거리는 소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 뒤에 조용히 누워 있는 피투성이 고기 덩어리는 무엇인가.






-2-


 이 이야기의 목적은 공포나 긴장 같은 기분 나쁜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정에 대한 산뜻하고 풋풋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정말 산뜻한 주제다.


 우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 서술자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해보고 싶다. 서술자라고 해야 할지, 이 글을 쓰는 필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본인은 매우 외톨이이다. 사실 필자이며 동시에 서술자인 사람은 항상 제3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외톨이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우정이라는 걸 잘 모른다. 그런 기분 나쁘도록 반짝거리는 인간관계 따위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명은 정말로 우정으로 뭉친 학생들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재우를 먹기 좋게 조각조각 자를 수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넷은 그저 그의 주위에 빙글 둘러앉은 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닥은 핏자국과 눈물 자국이 서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 되어버렸다.


 문득 유정이 재우의 목을 살펴보니 재우의 대동맥을 정확히 꿰뚫은, 지름 약 5mm정도 되는 송곳 자국이 뚫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대량의 피는 그것 때문일 것이었다. 뭔가 생각난 듯 유정은 벌떡 일어나 기분 나쁜 도구들이 쌓여있는 구석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러나 송곳은 없었다.


 비슷한 도구도 없었다.


 송곳이 아니면 그 자국은 생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학생들은 유정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유정은 방금 그 셋을 향해 째려봤던 걸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정의 표정은 금세 풀렸다. 풀렸다고 하기 보다는 오묘하다는 표정이었다.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유정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기분 나쁜 생각이 유정의 뇌에서 넘쳐흘러 나왔다. 그 생각은 넘쳐흘러 유정의 표정에도 드러났다.


 눈치가 빠른 진수와 신지는 유정의 표정에서 뭔가 읽어 냈다. 그러나 정확히 유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저 진수와 신지의 뇌 속에서도 기분 나쁜 생각이 점점 차오를 뿐이었다.


 한편 유진의 뇌는 정지했다. 그녀는 도저히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 했다. 그녀는 순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그녀는 밖의 더러운 녀석들처럼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면 돼. 물론 은은하게 철 비린내가 코를 찌르긴 하지만, 그래 이건 그냥 교실 책상의 쇠 기둥에서 나는 냄새야.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미친 듯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결국 나를 해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순수함을 지켰다. 진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음이 여린 그녀가 갑작스럽게 이 상황을 겪게 되었으니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진수는 유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 포옹은 너무나 따듯해서 서로에게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역겨워, 라고 멀리서 보던 신지가 말했다. 그녀는 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하얀 그녀의 피부를 벗기면 검은 타르가 끈적하게 흘러내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게다가 진수의 여자 친구이다. 진수와 만난 건 신지가 먼저인데 어째서 그를 가진 건 유진이 된 것일까. 신지는 아직 진수가 유진과 사귄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 네 명과 함께 다니는 것이다.



아직 진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3-


 솔직히 말해 나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전지전능한 서술자가 아니다. 모든 인물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밀실에서는 인간의 감정이 극도로 단순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감정을 추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추리가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게 뭐야.


 결국 모두 이야기하는 사람 마음이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이 이야기에 판타지에 나올 법한 마법을 등장 시키거나 이야기를 과장 시켜 지구의 운명이 달린 인질극으로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이야기니까 사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엔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다.


 현실에서 진실을 찾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진실조차 거짓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밀실에서는 무엇이 O이고 뭐가 X일까.


 신지는 그 물음에 유진을 향해 커다란 X를 그릴 것이다. 유진은 자신을 향해 커다란 O를 그릴 것이다. 결국 O와 X라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누가 틀리고 누가 옳다고 할 순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유진이 죽었다는 것이다.


 유진은 재우가 죽은 다음 날에 죽었다. 이 방에도 밤과 낮이 존재하는 듯 했다. 방에 달린 하나 뿐인 전등에서 불이 나가면 밤이 되는 것이고, 다시 불이 들어오면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유진은 그날 밤에 죽었다는 의미가 된다.


 유진은 천장에 목을 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마치 다른 누구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기 스스로 죽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신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역시 유진은 죽을 때도 완벽하게 유진다웠다.


 완벽했다.


 진수는 천장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고기 덩어리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가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프게 우는 건지. 진수의 눈에서는 진심이 담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진수의 그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는지 신지는 진수에게 정신을 좀 차리라고 일침을 가했다. 어떻게 일 년 이상 사귀었으면서 자기보다 유진에 대해서 모를 수 있냐고 신지는 진수에게 따졌다. 아니지, 왜 일부러 모른 척을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수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신지를 향해 비웃고, 일부러 신지 앞에서 진수와 과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이게 순수한 여고생이 할 짓이냐면서 진수를 향해 물었다.


 진수는 대답이 없었다.


 물론 유정도 대답이 없었다. 말 없는 표정만이 더 어두워졌다.


 신지의 이야기는 계속했다. 유진이 신지에게 무슨 문자를 보냈는지 모조리 말했다. 자기보다 진수에게 먼저 고백하면 학교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겠다던가 진수랑 더 가까워지면 가까운 술집에 창녀로 보내 주겠다던가. 이게 정말로 순수한 여고생이 보내는 문자냐며 신지는 다시 진수에게 따졌다.


 그리고 수학여행 첫날밤, 신지가 말을 이었다.


 유진은 신지의 입을 청테이프로 막고 줄로 꽁꽁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다행히도 그런 그녀를 샌드백처럼 대하진 않았다.


 대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진수와-


 거기까지, 라고 진수가 말했다. 그러나 신지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느낌이 어땠어, 라고 물었다. 참도 신 나게 하더라, 하고 따지기도 했다. 신지의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원래 유진은 그런 아이잖아. 그런데 왜 착한 척하며 모두를 속이는 그녀를 왜 감싸는 거야, 라고 신지는 울면서 말했다. 이젠 자기를 바라봐 달라고 애원했다.


 유진이 죽었으니 이제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울면서 부탁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 대로라고 하면 예상 대로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면 다음에 죽을 사람은 자신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신 유정은 속으로 줄에 매달린 유진에게, 유진의 죽음 향해 커다란 X를 그렸다.






-4-


 다행히 유정은 다음 날 죽지 않았다.


 대신 상처투성이 신지가 피투성이 바닥에 아무렇게 누워 있었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결국 신지도 죽였구나, 하고 유정은 진수에게 말을 걸었다. 대신 행복하게 죽었잖아, 하고 진수가 대답을 했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둘은 말없이 배를 채웠다.


 재우는 거의 뼈만 남은 상태다.


 너도 어젯밤 즐거웠냐, 하고 다시 유정이 진수에게 물어 보았다. 그래도 신지보다는 유진이가 더 좋았어, 하고 진수가 다시 대답을 했다. 다시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유진의 시체는 아직도 줄에 매달린 채였다. 그 새하얀 덩어리는 마치 건드리면 순식간에 일그러질 것만 같아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새하얗게 남아있었다.


 사실 유진이가 자살한 게 아닌 거 알고 있어, 라고 유정은 진수에게 말했다. 유정은 그녀가 죽기 전날 밤, 누군가가 그녀의 목에 밧줄을 두르고 조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도 봤구나, 하고 진수가 말했다. 알면서도 그들은 유진이 끝까지 유진다울 수 있도록 자살이라고 해줬다. 그리고 유진은 정말 끝까지 유진다웠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 입을 연 건 진수였다. 신지가 유진이를 죽였고, 자신은 신지를 죽였으니 너는 날 죽이면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보통 이런 결말이잖아, 라면서 진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유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그게 아니라며 유정이 말했다. 너는 한번 정도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수는 잠시 당황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곧 얼굴빛이 풀어지고 하하 하면서 웃었다. 결국 그것까지 알아챘구나 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말이야 유진이 나한테 말했단 말이야, 진수는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수학여행 둘째 날 아침에 유진이 진수에게 찾아와서 한 첫 말이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는 것을 말했다. 성적도 높고 대인 관계도 완벽한 자신이 이런 하찮은 실수 때문에 대학교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며 유정에게 반문했다.


 유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아, 사실 나는 너도 곧 죽일 거였어, 라고 진수가 말했다. 신지와 유진을 강간하고 두 여학생과 목격자인 재우까지 죽인 유정이 나까지 죽이려 해서 나는 유정에게 반항을 했는데 결국 유정이 죽고 말았고 나만 탈출했다, 라는 완벽한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단 말이야, 진수는 자기 머리를 톡톡 건드리면서 웃었다.


 결국 너희와 친하게 지낸 건 대학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어.


 그런 말을 진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있잖아, 우리 반의 '공기' 있잖아, 사실 그 녀석도 내 진로에 방해되니까 내가 멋대로 왕따로 만든 거야, 라고 진수는 자랑을 시작했다. 잘난 점이 하나도 없는, 그렇기에 못난 그런 녀석과는 어떤 연결 고리도 있어선 안 된다고, 그렇기 때문에 인맥을 총동원해서 '공기'로 만들어 버렸다고 진수는 말했다.


 유정은 그래서 그 '공기'가 누구냐고 물었다.


 진수도 사실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그 '공기'라는 친구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이 방금 말한 '공기' 이야기도 실은 허세를 부리기 위함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공기'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인물일 지도 모른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진수는 너무나도 손쉽게 유정의 왼쪽 눈에 가위날을 푹 박았다. 동시에 유정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시야가 붉고 흐릿하게 변했다.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방금 느낀 고통은 사실 거짓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어느새 유정은 눈에서 뽑은 가위를 진수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당황한 진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유정이 휘두른 가위는 진수의 오른쪽 종아리에 박혔다. 진수는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나갈 수 없잖아. 그러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모두 정당화가 된다는 거잖아. 유정은 떨리는 두 손으로 유진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사실 난 널 좋아했어,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유정은 유진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네가 네 본모습을 숨기려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어, 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나는 너의 본모습조차 좋아하게 됐어, 라며 유진의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정말이지,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유정은 유진을 바닥에 다시 눕힌 후 그녀의 옷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있었다. 젠장, 진수는 불구가 된 한쪽 다리를 끌면서 두 팔꿈치로 유정을 향해 기어갔다. 나만이 그녀를 만질 수 있어, 라고 진수가 외쳐보지만 더 이상 유정의 귀에는 그런 것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젠장, 진수는 계속 기어갔다. 유정이 유진을 더 이상 건드리면 그의 완벽한 여자 친구가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더럽혀질 지도 모른다.


 유정이 떨리는 손으로 유진의 스타킹을 벗기려고 할 때 진수는 자신의 종아리에서 가위를 뽑고 유정의 등에 가위를 꽂았다. 또 뽑고 꽂았다. 다시 뽑고 꽂았다. 그리고 뽑고 꽂았다. 아름다운 분수처럼 네 가닥의 붉은 피가 유정의 등에서 솟구쳐 올랐다. 천장과 바닥이 모두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진수의 얼굴도 붉어졌다.


 유정은 그렇게 대량의 피를 쏟아낸 후 유진 위에 쓰러졌다.






-5-


 결국 진수만이 밀실에서 살아남았다.


 아아,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결말이다.


 이 이야기가 끝나게 되어 나 역시 슬프다. 왜냐하면 서술자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면 서술자도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이제 무대를 정리하고 배우들도 내려가고 내레이션도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서술자는 외톨이 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차피 내 교실의 '공기'일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공기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걸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방 안을 싸늘한 공기가 가득 채웠다.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치자.


 그리고 나는 주머니에서 송곳을 꺼내 진수의 목에 꽂고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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