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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겨울잠

천가을(千秋) 2018.03.22 13:13

“으와아악!”


잠에서 깬 나는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헉,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우웅, 부드러운 전자음이 방 전체에 낮게 깔려있는 점 말고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손목의 입체 스크린을 톡톡 두드려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2시 35분이었다.


아무래도 굉장히 좋지 않은 꿈을 꾼 듯했다. 속은 그나마 좀 진정되었지만 아직도 끈적끈적한 식은땀이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비명소리를 들은 건지 어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와 내 방 불을 켰다.


“세상에, 무슨 일이니?”


“그냥....... 악몽을 꾼 것 같아요.”


“무서운 꿈이었나 보구나.”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내게 달려와 꼬옥 안아주셨다. 아버지도 덜깬 눈을 비비며 뒤늦게 달려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은 엄마아빠랑 같이 잘까?”


“아니야, 괜찮아. 애기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어린애 취급 하신다. 이제 벌써 유치원도 졸업한 초등학생인데. 툭 하면 자주 넘어지고 자주 울던 어렸을 적의 나와는 다르단 말이다.


어머니는 내가 걱정스러운 건지 내 침대 옆에 계속 서있었다. 아버지가 와서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린애가 아니니까 혼자서 잘 수 있을 거야’라고 안심시킨 후에야 어머니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셨다.


불이 탁 꺼진 뒤 나는 눈을 다시 감았다.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거리 위를 밤새 돌아다니는 정찰 드론들의 날개회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곧 잠에 들었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금세 잊을 수 있었다.






2056년,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는 종종 내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고 하시면서 나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그때까지 나는 지하실이 완전히 아버지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창 도로 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여름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실 공기는 서늘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무거운 진동음이 가까워졌는데, 아버지가 설명하길 그것은 이 집 전체를 공중에 띄워주는 반중력 장치의 모터가가 돌아가는 소리라고 했다.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양자뇌과학 엔지니어였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엔지니어 앞에 붙어있는 ‘양자뇌과학’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 다만 아버지는 그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모양이었고, 그래서 나도 그 짧은 다섯 글자짜리 단어를 혀 꼬이지 않고 말할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주로 작업하는 공간이 바로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에는 위험하고 복잡해 보이는 장비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고글과 헬멧, 장갑만 끼면 무슨 장비든 척척 움직여냈다. 한 손으로는 허공에 떠 있는 스크린을 조작하고, 다른 손으로는 장비를 세부 조작하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언젠가는 내게 기억 재생 장치란 것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우리의 기억이란 건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거든.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은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감각이란 건 상당히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기억은 유약하고 주관적이야. 하지만 우리의 기억이 어떤 객관적인 현상을 토대로 형성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즉,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노이즈를 제거하고 역추적하면 우리가 기억하는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안마 의자처럼 생긴 그것의 전원을 켰다.


“물론 이건 이론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우리의 두뇌에서 통통 튀어 다니는 전기신호들은 그 자체로 확률적이라서 그 전기신호를 해석하는 데에 필연적으로 오차가 생기고 말아. 다행히 그것이 완전히 무작위란 의미는 아니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 근사할 수는 있지. 두뇌에 있는 전기신호를 해석하고, 근사해서, 노이즈를 제거하고, 역추적을 통해 당시의 감각을 재현한다. 이게 바로 이 장치가 하는 일이란다.”


그런 이야기를 초등학생에게 해봤자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내 앞의 저 안마의자가 내 기억을 읽고 재생시킨다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 혼자서 즐기는 타임머신 같은 것이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는 나의 과거로 잠시 여행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한 번 해봐도 돼?”


“아직 시험제작 단계라서 위험해.”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딱 5분 동안은 괜찮지 않을까!”


나는 와아 환호성을 질렀다.


아버지는 우선 의자 옆에 달린 반투명 스크린을 보여주면서 내게 조작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의자 위에 앉힌 뒤에 내 머리 위로 덮개를 씌웠다.


“무슨 기억을 보고 싶니?”


“으음, 작년에 여행 갔을 때!”


“오케이, 접수 완료.”


곧 덮개 내부에 형형색색의 빛이 순차적으로 번쩍거리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마치 마비된 것처럼 푹신한 의자 안으로 점점 가라앉았고, 나의 의식도 오색의 빛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나에게는 2살 아래인 동생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생이 있었다. 내가 4학년이었을 때 동생은 어떤 사고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우리 가족의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도 아마 그때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은 어린애라고 불리기엔 너무 크고, 다 컸다고 말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알만한 건 다 아는 나이었으니까.


동생을 잃고 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탓했고, 아버지는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버럭 소리 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점점 심해져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지하실에 틀어박혀 살았고, 어머니는 출근했다가 밤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혼자였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나를 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몰랐다.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전쟁 이야기만 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 어째서인지 매번 졌다. 지하실에서는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고, 어머니는 눈물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마치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거대한 블랙홀 때문에 뒤틀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동생은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내일부터 학교에 안 나와도 된대. 응, 나도 선생님께 들었어. 아빠랑 엄마는 언제 화해할까? 아빠 얼굴이 기억 안나. 왜 싸우시는 걸까? 네가 없어져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동생이 있던 자리에는 낡은 곰인형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동생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를 곰인형이 비웃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동물원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동생은 도착하자마자 들떠서 호랑이를 보러 가겠다고 막 뛰어갔다. 덕분에 운동부족인 아버지는 헐떡거리며 동생을 쫓아가야 했다. 나는 호랑이보다는 곰을 보고 싶었다. 나는 낡은 곰인형을 안은 채로 곰을 보러 호랑이 우리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호랑이는 엄청 컸다.


가두고 있는 우리보다도 엄청 커서 금방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동생은 들떠서 와아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호랑이도 덩달아 어흥하고 울부짖었다. 동생은 더욱 들떠 방방 뛰어다녔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면서 반쯤 지친 몸을 이끌고 동생을 따라 호랑이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한편 곰은 굉장히 얌전했다.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눕기 좋게 생긴 동굴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았다. 나는 곰인형을 우리를 향해 내밀어봤지만 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곰이 안 움직여요. 죽은 거야?”


“자는 거란다. 곧 겨울이 오거든.”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겨울을 버티기 위해서 곰은 깊은 잠에 잠들어.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잠에서 깬단다.”


“곰은 정말로 잠꾸러기네. 겨울 내내 자는 거야?”


“너도 겨울이 되면 매일 늦잠 자잖아.”


“아닌데!”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곰이랑 닮았다고 말했다.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도 별로 어떤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나와 곰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보였다.






기억은 유약하고 주관적이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하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소풍을 가기로 했다. 동생은 들떠서 바다를 계속 외쳤지만 어머니는 우리가 가는 곳이 바다가 아니라 공원이라고 말했다.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원래도 엄청 넓은 공원이었지만, 사람이 없으니 더욱 넓게 느껴졌다. 저 멀리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에 넓게 펼쳐진 초록 풀밭을 보자 동생은 흥분해서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원을 크게 그리며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기지개를 펴더니 ‘또 내가 나설 차례인가!’ 하고 말하며 동생을 쫓아갔다.


나는 살짝 경사진 언덕 위에 기대 누웠다. 여름햇살은 따뜻하고 눈부시고 살벌했다.


어머니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에 그새 주름이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 울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자기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착하지만 쉽게 망가지고,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강한 사람이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생각해주지 못했다면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동생이 뛰어노는 쪽을 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안해.......”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는 나를 언덕 아래를 향해 밀었다. 순간 놀란 나는 어머니를 부르며 팔을 뻗었지만,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곧 하늘을 향해 커다란 폭죽이 올라 해를 가리더니.......






“우와아아악!”


잠에서 깬 나는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벽 2시 35분.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골랐다.


내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가 방 불을 켜고 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흘러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으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냥....... 악몽을 꾼 것 같아요.”


“무서운 꿈이었나 보구나.”


어머니는 내게 다가와 나를 꼬옥 껴안았다.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 어머니의 품 안에 기댔다.


무서운 꿈이었어요.


엄청 무서운 꿈.






그리고 꿈에서 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도 아버지는 내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며 나를 지하실에 데려갔다.


그날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길게 느껴졌다. 서늘하고 눅눅한 지하실 공기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등 뒤에서 지하실 문이 쿵하고 닫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그곳에 서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것은 또 다른 아버지였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게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곰인형만이 내 품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샌드백처럼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이상한 노이즈가 잔뜩 껴서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뒤에는 안마의자처럼 생긴 장치가 있었다.


“이걸 기억 재생 장치라고 부른단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설명했다. 동생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굉장히 대단한 장치라는 건 이해한 모양이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장치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안 된다고 했지만 동생이 토라지자 딱 5분만 쓰자고 말했다.


거기서 비극이 시작됐다.


나는 기억 재생 장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지하실 풍경이 점점 뒤틀렸다.


벽에 금이 커다라게 났다.


서랍장이 쿵 하고 무너졌다.


옆에 쌓여있던 상자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나를 지하실로 밀어 넣으며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눈물을 떠올렸다. 곧 반중력 장치의 제어가 망가지면서 집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몸이 붕 하고 뜨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와 우리 집이 아래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락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형형색색의 빛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속도가, 추락하는 속도가, 과거에서 현실로 흘러가는 속도가, 점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깜깜해졌다.


스르륵 덮개가 열리자 나는 처음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어 멍 하니 가만히 앉아있었다. 곧 나는 내가 기억 재생 장치 위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캐한 냄새에 코를 찡그리며 나는 눈을 비볐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두 팔에 힘을 싣자마자 후들거리면서 바로 무너졌다. 나는 거의 구르듯이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하실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손목을 두드려 입체화면을 불러냈다. 입체화면은 심하게 깜빡이긴 해도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현재시각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59년 2월.


그러면 내가 몇 살인 거지? 어째서인지 도통 암산할 수 없어 나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나 둘 나이를 셌다. 그러니까 내가......, 아, 14살이구나. 2월이니까 아직 중학생은 아니고 초등학교를 막 졸업할 시기였다.


나는 장치를 짚고 바들바들 떨리는 두 다리로 겨우 일어섰다.


기억 재생 장치의 스크린은 전원이 안 들어오는 건지 완전 새까맸다. 그러고 보니 항상 켜져 있던 지하실의 전등도 꺼져있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 집이 추락하면서 전력이 끊겼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리고 대략 1년 반 동안 기억 재생 장치를 작동시킨 비상 전력마저 이젠 다 써버린 거겠지.


아직도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아 나는 이마를 짚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나는 바닥 위에 떨어져있는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원래 연두색이었을 그것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거의 회색에 가까운 색깔이 되어있었다. 그 위에 써져있는 아빠의 손 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드디어 완성했지만, 이미 늦었다.’


포스트잇을 보자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시작한 날,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어머니는 나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안전하고 튼튼한 지하실에 나를 밀어 넣었다. 어째서 어머니는 같이 오지 않는 거냐고 울면서 매달리자, 어머니는 자신은 반동력 장치 맡아야한다고 하면서 나를 지하실에 가뒀다.


그리고 집이 추락했다.


다행히 어머니 덕분인지 집이 심하게 기울거나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그날 망가진 지하실 안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동생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의지할 곳을 찾던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기억 재생 장치였다. 잔해더미 속에서 힘을 짜내면서 기억 재생 장치를 향해 기어간 나는, 행복했던 꿈속에서 잠들기로 결심했었다.


마치 겨울을 준비하는 곰처럼.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기억 재생 장치가 아무리 완벽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 기억은 왜곡되어있는 점이 너무 많았다. 나는 기억 재생 장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퍼뜩 깨달았다.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지만 나는 기억 재생 장치를 짚고 겨우 무게중심을 잡았다. 어느새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1년 반.


1년 반 동안 나는 장치 속에서 동생과 함께였구나.


하지만 이젠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전력을 끊겼고 비상 전력도 다 썼다. 장치는 너무 커서 내가 옮겨 다닐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안에, 2년 전 죽은 동생의 기억이 아직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눈물 흘리는 걸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 위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장치를 끌어안고 한참 울다가 그친 나는 먼지투성이 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았다. 이제 팔다리에 힘이 돌아와 제대로 일어설 수 있게 됐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하실은 살짝 옆으로 기울어있었지만 지하실 계단은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억 재생 장치를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난간을 붙잡고 살짝 기울어진 계단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하나씩 올라갔다. 마침내 지하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기억 재생 장치를 다시 돌아보았다.


“......안녕.”


그리고 나는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창백한 햇살이 나를 반겼다. 1년 반만의 눈부신 햇빛에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팔로 햇빛을 가렸다. 실눈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처참하게 무너진 도시가 드넓게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지하실 문을 닫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가족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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