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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무제.

천가을(千秋) 2018.03.22 13:14

기호 1번.


이름: 렌노 하지메(連野 一)


키: 179cm 몸무게: 85kg


취미: 비디오 게임하기.


장래희망: 없음.


최종점수: 43점.






켄시 형사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남자 고등학생이 쓰는 방치고는 꽤 깨끗했다. 어쩌면 원래 더러운데 켄시 형사와 고코우 형사가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청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수직으로 딱딱 정돈되어있는 책상 위와, 마치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침대를 보면 아마 후자가 아닐까 하고 고코우 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목을 매단 남학생이 축 늘어져있었으니까.


켄시 형사는 방 안으로 들어와 남학생의 시체를 살폈다. 물론 일본에는 해마다 수많은 학생들이 목을 매달지만, 이 남학생은 무언가 달랐다. 우선 옷이 평범한 옷이 아니라 빳빳한 검정색 정장에 반짝이는 구두였다. 그의 머리는 왁스로 세심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고코우 형사는 이것이 평범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상당히 준비된 마음가짐으로 한 자살처럼 보이는데 정작 유서가 안 보이는군.”


“어디다가 숨겨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학생의 가족과 지인들은 전부 자살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그랬지. 누구에게도 알려주지도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이 모습은 자신의 죽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고코우 형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방 안의 사진을 찍던 켄시 형사가 말했다.


“혹시 자살을 위장한 타살은 아닐까요?”


“글쎄, 안타깝게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네.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이 학생은 분명 자살은 한 걸 테야. 하지만 자살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군.”


켄시 형사는 고코우 형사를 바라보았다.


감은 두 눈 주변에 깊게 파인 주름들이 노을에 비쳐 붉게 물들었다. 마침내 눈을 뜬 고코우 형사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네.”






*






기호 2번.


이름: 오리가미 지로(折紙 次郎)


키: 163cm 몸무게: 65kg


취미: 독서.


장래희망: 없음.


최종점수: 53점.






이번 방 안에는 책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남학생의 시체가 허리를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목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켄시 형사는 책들을 밟지 않게 까치발로 걸어가 남학생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돌려보니 입 안에는 찢어진 종이쪼가리들과 샤프펜슬이 꾸역꾸역 꽂혀있었다.


켄시 형사는 남학생의 얼굴을 사진기로 찍으면서 말했다.


“자살이겠죠?”


“글쎄.......”


고코우의 시선은 그러나 시체가 아닌 다른 곳에 꽂혀있었다. 그것은 문 옆에 붙어있는 플라스틱판이었다. 고코우 형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판에 적혀있는 작은 글귀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작품명: 지식의 바다


제작: 오리가미 지로


해설: 이 작품은, 지식의 바다라고 불리는 책과 학교에 빠져 고통스럽게 익사하는 모습을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닥에 펼쳐져있는 수많은 책들은 바다를 형상화한 것이며, 입 안의 샤프와 종이는 더 이상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지식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현 교육의 실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전혀 모르겠어.”


고코우 형사는 중얼거렸다.


이 학생은 자신의 죽음을 예술로서 표현한 것인가?


켄시 형사는 시체의 얼굴을 내려놓고 문 밖에 서있는 고코우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전에 정장 입고 자살한 남학생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그럴 지도 몰라.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최근에 엽기적인 자살 신고가 갑작스럽게 많이 들어왔어. 아마 이것들이 전부 무언가와 연관되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야.”


“학생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요?”


“그래,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잖아요.”


고코우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이 학생들을 죽음으로 스스로 몰고 있는 건지.


무엇이 이 학생들의 죽음을 포장하려고 하는 것인지.






*






기호 7번.


이름: 사카키바라 나나미(榊原 七海)


키: 172cm 몸무게: 60kg


취미: 방과후에 농구하기.


장래희망: 없음.


최종점수: 72점.






“선배, 이건 도대체.......”


켄시 형사는 문을 열자마자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퍼져오는 향기로운 꽃향기에 고코우 형사는 코를 찡그렸다. 방 안에는 수십 송이 정도는 되어 보이는 붉은 장미꽃들이 방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분홍색이나 흰 장미도 섞여 한층 더 화려해보였다. 벽에는 담쟁이덩굴처럼 생긴 장식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건 그 장미송이에 파묻혀 있는 여학생의 창백한 나체가 아닐까.


고코우 형사는 방 안의 비정상적인 한기에 바르르 떨다가 에어컨이 가장 낮은 온도에 맞춰져있음을 발견했다. 늦가을에 에어컨이라니, 전원을 끄고 싶었지만 가급적이면 현장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라 고코우 형사는 손을 서로 비비며 문 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켄시 형사 역시 오들오들 떨면서 조심스럽게 장미송이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방바닥의 시원한 한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켄시 형사는 부르르 떨었다. 장미를 조심스럽게 치우니 가려져있던 여학생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시체는 마치 동화 속의 공주를 연상시켰다.


켄시는 고코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학생도 자살일까요?”


“최근에 학생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장미 이외에도 수면제를 구매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이것 역시 부검해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아마 자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켄시 형사는 다시 여학생을 내려다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살짝 찡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꼭 다문 두 입술 사이에서는 심각한 악취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학생의 입을 살짝 벌린 켄시는 안을 들여다보고서는 다시 조용히 닫았다.


“죽는 순간까지 구토를 참은 모양이에요.”


“이 아름다운 모습에 구토를 흘리고 싶진 않은 모양이지.”


“이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코우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 직전까지 구토를 참아가며 지키려고 했던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 걸까? 고코우 형사는 여학생의 시체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고통에 살짝 일그러져있었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걸.”





*






기호 10번.


이름: 텐노지 토코(天王寺 とおこ)


키: 152cm 몸무게: 52kg


취미: 크레파스로 색칠하기.


장래희망: 없음.


최종점수:






문을 천천히 열었더니 그곳에는 기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 안에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침대도 책상도 없었다. 그것들은 나중에 근처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다. 가구가 하나도 없는 방은 다른 방들에 비해 특히나 텅 빈 허무감을 자아냈다.


그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허공에 떠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박힌 시체가 목매달고 있었다. 그것은 천장에 매달린 줄을 따라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십자가에 박힌 양손에서 새어나온 피가 바닥 위에 뚝뚝 떨어져 방 안에 검붉은 원을 그렸다.


십자가에 박혀있는 건 흰 가운 하나만 걸친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텐노지 토코, 기호 10번. 방 안에 찾아온 검은 양복의 사람들 중 한 명이 방 안에 성큼성큼 들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토코의 시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흐음, 우선 오른손으로 왼손을 십자가에 박은 뒤, 오른손은 십자가에 미리 박아놓은 못에 세게 내리꽂은 모양이군요.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겠네요.”


“하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들여야 했던 이유는 잘 모르겠군.”


문 밖에 서 있던 남성은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텅 빈 공간과 허공에 뜬 십자가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야. 이건 높게 평가해줄 수 있겠어. 혹시 다른 의견 있나?”


남성이 같이 서있던 단발머리 여성과 안경 쓴 남성에게 뒤돌아보았다. 이들은 ‘아름다운 죽음 수행평가’를 위해 파견된 네 심사위원들이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로 비슷한 의견입니다.”


“저 역시.”


“그렇다면 점수를 내도록 하자.”


네 심사위원이 준 점수는 각각 15점, 13점, 17점, 15점. 남성은 평가표에 펜으로 슥슥 적었다.




최종점수: 6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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