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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구멍

천가을(千秋) 2018.03.22 13:15

동생과 크게 다툰 뒤에 가장 곤란한 건 동생에게서 뭘 빌릴 수 없다는 점이다.


다 한 숙제를 스테이플러로 찍으려고 내 방 구석구석을 찾아보던 나는 내가 내 스테이플러를 학교 사물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동생 방에서 스테이플러를 빌려야 했지만, 방금 동생과 별 거 아닌 일로 말다툼 벌이다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은 벽에 난 구멍이었다.


구멍의 크기는 손 하나를 쑤욱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꽤 컸기 때문에 처음 구멍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게 있다는 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의아해했다. 그 구멍이 있는 벽은 동생 방과 내 방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그 벽이었다. 나는 구멍 안을 들여다봤지만, 구멍이 상당히 큼에도 불구하고 구멍 안은 온통 암흑 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동생이 무언가로 가로막은 건가, 나는 손을 집어넣어봤지만, 어깨가 벽에 닿을 정도로 팔을 전부 넣어 봐도 손에 닿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마치 물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나는 내 손이 마치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팔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나는 무언가 딱딱한 것이 손에 닿은 것을 느꼈다. 허공에 붕 떠있는 그것을 잡고 손을 구멍에서 빼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잡힌 것은 동생의 스테이플러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저 구멍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나는 동생의 스테이플러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구멍 안에 팔을 집어넣어보았다. 내가 아끼던 샤프를 엄마가 뺏고 동생에게 줬던 걸 떠올리면서 이번에 나는 내 샤프가 손에 잡히기를 바랐다. 구멍 속에서 팔을 이리저리 휘젓던 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손바닥을 찌르는 것을 느끼고 잽싸게 그것을 잡았다.


그것은 정말로 내가 아끼던 그 샤프였다.


나는 히히 웃었다. 이 구멍만 있으면 동생에게서 뭔가를 빌리기 위해 창피하게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구멍에 또 다시 팔을 집어넣었다. 뭘 원하는지 상상하지 않아서 그런가,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번엔 뭘 가져와볼까, 재수 없는 동생을 괴롭힐 생각에 들뜨던 나는 마침내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굉장히 물컹하고 표면이 끈적거렸다.


아직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속으로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구멍 밖으로 꺼내보려고 팔을 당겼다. 하지만 어딘가에 고정되어있는 걸까 아무리 팔에 힘을 줘도 그것은 좀처럼 허공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구멍에 넣은 팔에 힘껏 잡아당겼다.


벽 너머에서 쿵 하고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이걸 놓치면 다시 못 잡을 거란 생각에 나는 그것을 계속 잡아당겼다. 벽 너머로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울부짖음이 들려왔지만 나는 내가 붙잡고 있는 것에 집중했다. 힘을 줄 때마다 그 울부짖음이 더 커지는 건 조금 신경 쓰였다.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기울이면서 힘껏 잡아당긴 뒤에야 그것은 마침내 조금 움직였다. 그것을 고정하고 있던 것이 투두둑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것은 또 다시 턱 하고 멈추고 말았다. 더듬어보니 그것은 기다란 밧줄 같은 것에 매달려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잡고 있는 내 손이 상당히 축축해졌음을 깨달았다. 끈적끈적한 액체에 뒤덮여 미끈거렸기 때문에 나는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줄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벽 너머로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허윽, 헉, 벽 너머의 울부짖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나는 슬슬 불안해졌지만, 이미 그것을 여기까지 잡아당긴 것이 아까워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만 잡아당기고 동생 방에 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른 손으로 벽을 밀치면서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그것을 고정하고 있는 밧줄이 팽팽해졌다.


벽 너머로 엄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떡해, 어떡해,’를 반복하는 것이 들려왔다. 팔을 타고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흘러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팔을 타고 구멍 밖으로 나온 것은 검붉은 액체였다. 잡고 있던 것은 구멍 뚫린 것처럼 푸쉭 쉭 계속 액체를 내뿜었다. 더 이상 벽 너머의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밧줄마저 툭 하고 끊어지자 나는 반동으로 뒤로 넘어졌다.


내 손에 잡혀있던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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