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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크게 다친 루돌프의 크리스마스

천가을(千秋) 2018.03.22 13:17

아빠가 드디어 눈을 떴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간 병원의 분위기는 2주 전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온통 새하얗기만 하던 벽에는 언제 달린 건지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고 있었고, 데스크의 간호사 분들도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코를 찌르는 불쾌한 약품 냄새 때문에 나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팔뚝에 링거를 달고 복도를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게 할머니가 말했다.


“여기가 네 아부지 병실이야.”


“응.”


병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2주 전에 봤던 것과 다름없이 여전히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이상한 약이 든 봉투도 잔뜩 달고 있었지만, 아빠가 눈을 뜬 것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기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빠는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와 나를 보자 아빠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아, 오셨군요.”


“하늘이도 데리고 왔다.”


나는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침대 옆에 앉았다. 할머니도 침대 옆에 과일바구니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오마.”


“네.”


할머니가 병실에서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아빠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는 할머니랑 잘 지냈어?”


“응. 아무 일도 없었어. 학원도 잘 가고, 친구랑 잘 지내고, 시험도 잘 봤어.”


“아아, 하늘이 시험 기간이었지.......”


아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금세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도 조금만 더 이렇게 지낼 수 있지?”


“......응.”


나는 조금 서운했으나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뒤 몇 초간의 정적이 있었다. 아빠는 창밖을 바라봤고,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나는 그래도 용기를 내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빠, 이번에는 산타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안타깝게도 산타가 선물 못 준대.”


아빠는 그렇게 딱 잘라 말했다. 마치 내가 그 말을 꺼낼 거란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어쩌면 아빠도 나처럼 방금 전까지 망설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알아.”


“하늘이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야. 하늘이가 착한 아이인 거, 산타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거든.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무슨 사정?”


“루돌프가 크게 다쳤거든.”


아빠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돌프는 어린이들이 자고 있는 8시간 안에 세계를 돌면서 선물을 배달해줘야 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고, 8시간은 너무 짧아. 겨울이라서 길도 꽁꽁 얼어붙어서 미끄러워. 그래도 배달해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슬퍼하니까 루돌프는 힘내서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결국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서 크게 다쳐버린 거야.”


“다른 루돌프는 없어?”


내 말에 아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하하 웃으면서 붕대로 칭칭 감아 뭉툭해진 팔로 내 머리를 힘없이 쓰다듬었다.


“그래, 다른 루돌프가 있지. 다른 루돌프가 배달하면 돼. 크게 다친 루돌프는 필요가 없어졌단다. 하지만 이미 다친 루돌프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에 선물을 미처 배달할 수 없는 아이들이 생기고 말았어.”


“그게 하늘이야?”


“응, 대신 다친 루돌프가 내년엔 선물을 두 배만큼 주겠다고 약속하겠대. 알겠지?”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는 씨익 웃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다친 루돌프는 어떻게 됐어?”


“다친 루돌프는......, 혼자야. 이젠 일을 못하니까.”


“불쌍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다친 건 빨리 달린 루돌프의 잘못, 선물 배달이 늦어진 것도 다친 루돌프의 잘못이니까. 다쳐서 지금 당장 책임 질 수도 없어. 그러니까 쓸모없는 루돌프는 혼자 버려질 수밖에.”


“쓸모없지 않아!”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다친 루돌프도 루돌프야! 쓸모없지 않아, 그러니까 버리면 안 돼!”


아빠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들어왔다.


“사과라도 하나 깎아줄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니야, 하나 깎아줄게, 그동안 택배 일 하면서 고생도 많았으니까.”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과일 바구니에서 과도와 사과를 집어 들었다. 거칠거칠한 손으로 사과를 능숙하게 깎는 소리가 사각사각 병실을 채웠다. 그 모습을 나와 아빠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병실 창밖으로 새하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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