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단편 소설

튕겨나가다.

천가을(千秋) 2018.03.22 13:18

#1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처음부터 열지 않았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롤리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면.... 핵미사일 버튼 하나로 종전될 전쟁 차라리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물론 그것은 어떤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상자를 열고 관측했을 때 그 고양이가 죽어있다면 그건 내가 그 고양이를 죽인 것인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롤리 때문에 누군가가 죽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브레이크 담당의 책임인 것이다. 전쟁 같은 거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게 하는 힘 따위 나에게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세상은 불합리하기에 이 모든 것이 마치 내 책임인 것처럼 포장된다. 이른바 이 세상이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내 눈앞에 죽은 고양이의 시체가, 저민 고깃덩어리로 변한 시체더미가, 순식간에 사라진 대도시 하나를 들이대면서 나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마치 폭탄 넘기기 게임처럼.


이 세상의 불가항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그 불가항력이 떠넘기는 책임 역시 거부할 수 없다. 누가 언제 그 책임을 뒤집어쓸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철저한 예방과 검토만이 나에게 떠넘겨질 책임의 수를 줄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사회와 동떨어져있는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결국 인간사회가 만든 하나의 약속이기에, 윤리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약속이 규정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갈등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부딪힐 사람, 그걸 비난할 사람, 그걸 방관할 사람, 그런 사람들이 없는 곳에 홀로 있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다만 그것이 터무니없이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결론이 또 이상한 곳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옆에서 듣고 있던 유리는 어느새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도 유리었다. 자기는 옆에서 누가 떠들고 있으면 잠이 잘 온다면서 아무 이야기나 해보라고 했던 것이다.


“정말로 자는 거야?”


나는 유리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유리의 머리가 살짝 휘청거리더니, 괴고 있던 손 위에서 미끄러져 책상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두꺼운 교재의 모서리 위였다. 모서리라고 해야 하나, 모서리 세 개가 만나서 만든 뾰족한 꼭짓점의 위였다. 유리의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찍혀 움푹 들어간 교재가 점점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유리는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 좀 어이없는 듯했다. 딱히 날 원망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의 책상 위는 새빨간 액체로 흥건해졌다. 나는 걸레를 가져오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우선은, 유리의 눈을 감겨주자.






#2




나와 유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한 사이가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교에서 내 옆에는 항상 유리가 있었고, 나는 언제나 유리의 옆을 따라다녔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느껴졌다. 유리가 나를 보고 있기에 비로소 내가 있고, 내가 유리를 바라보고 있기에 유리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비 내리는 운동장 위를 둘이서 나란히 걷다가 나는 슬쩍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우리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우산을 잡지 않은 손으로 서로의 손을 더듬으면서, 우리는 상대방이 아직 내 옆에 있음을 확인했다.


손잡고 걸어가던 중에 유리가 입을 열었다.


“어제 그거 있잖아.......”


“그거? 아, 응.”


하필이면 그 바로 밑에 딱딱하고 뾰족하기로 유명한 그 교재의 모서리가 있었는데, 다행히 반사적으로 뻗은 손이 유리의 머리를 감싸줘서 큰 사고로 이어지는 걸 면할 수 있었다.


유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 붙인 반창고를 더듬었다.


“그냥, 고맙다고.”


“응.”


교문 밖을 나가자 차 한 대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사거리길이 나왔다. 우리 집과와 유리의 자취방은 다른 방향으로 건너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쪽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손잡고 가만히 기다렸다.


유리 쪽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먼저 켜졌다.


나는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유리도 내 쪽을 뒤돌아보며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미끄러운 빗길 위를 재빠르게 미끄러지던 커다란 트럭이 내 옆을 지나면서 빗물과 핏물을 튀기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3




“......좀만 더 같이 있다 가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하얀 트럭이 열차 지나가듯 빗길 위를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면서 우리 옆을 스쳐지나갔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굉음소리와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유리가 입을 열었다.


“만화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만화? 아, 그냥....... 잘 그리고 있어.”


내 꿈이 만화가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유리밖에 없었다.


내 대답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우산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꺼졌던 초록불이 다시 켜지자 유리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또 보자.”


유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 위에 쓰러진 타이어를 피하며 길을 건너는 모습을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유리의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초록불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유리의 싸늘한 시체가 사방이 피투성이가 된 계단 위에 누워있었다.






#4




손을 놓쳤다.






#5




손을 잡았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한 유리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앗, 고마워.......”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등교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설마 계단에서 미끄러진다고 죽기라도 하겠니.”


유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쿡쿡 웃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넌 예전부터 쉽게 다치는 체질이잖아. 조심하라고.”


“나도 알고 있어. 그렇게 화내지 마.”


계단을 오르던 유리는 뒤돌아서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창밖의 아침햇살을 등진 유리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저 유리창처럼, 유리가 점점 투명해지다 결국 파스스 깨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작게 웃었다.


“화 안 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 안 났어.”


내 모든 걸 삼켜버릴 것 같은 저 미소.


반쯤 뜬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으면 이 세상의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블랙홀처럼,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할 것 같은 그런 새까만 눈동자였다.


그 안에 이미 빨려 들어간 내가 비쳐보였다.


“자, 늦겠다. 가자.”


유리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응, 미안.”


나는 허겁지겁 계단 위를 올라갔다.


(후략)






#31




“이게 아마 서른한 번째인 것 같네.”


“무슨 뜻이야?”


“......있어, 그런 게.”






#127(오류)




그날도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다. 유리와 손잡고 나란히 걸으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나는 교문 밖 횡단보도를 보고 멈칫했다. 있어서는 안 될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아, 아니 그냥.......”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몸은 자꾸만 휘청거렸다. 유리의 교복은 어째서인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축축한 운동장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유리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유리의 손이 점점 다가오더니 내 눈앞을 부드럽게 가렸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






#32767




“오른손을 더 이상 제대로 못 쓸 것 같네요.”


의사선생님의 말에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만화의 밑그림이 순간 떠올랐다.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힘을 줄 때마다 오른손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일상생활에 커다란 지장은 없을 겁니다. 다만 섬세한 수작업은 불가능한 정도.......”


더 이상 그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에게 볼일이 없어진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진료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리가 내게 달려왔다.


“오른팔 괜찮아?”


“보다시피 이런 상태야.”


나는 힘없이 웃으면서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보았다.


유리는 내 오른손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꼬옥 붙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눈물을 보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괜찮아, 대신 널 살릴 수 있었으니까.”






#65535




내가 유리를 죽였어.






#2147483647




지쳤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젠 유리를 포기하려고 한다.


문득 유리의 미소가 생각났다. 내 모든 걸 삼켜버린 그 미소. 그걸 보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비를 넘겨야했는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눈을 감았다. 옥상의 바람에 교복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쩌면, 내가 없어도 유리는 잘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만, 나는 살며시 웃었다.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꽈악 붙잡으며 생각했다. 내가 사라진 뒤에 유리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떤 생각을 할까. 결국 죽기 직전까지 유리가 생각밖에 안하고 있네. 난 정말로 유리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내가 죽은 뒤에도 유리가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선 두 다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잘 가.


옥상 문이 벌컥 열리는 그 순간, 나는 마침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옥상 위에서 바라보는 유리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2147483648(실패)




세상이 뒤집혔다.


내가 난간에서 도로 옥상 바닥 위로 내려온 순간, 옥상 문이 벌컥 열린 순간, 나와 유리가 눈이 마주친 순간, 온 세상의 안팎이 전부 뒤집히고 나는 보았다.


이 세상의 ‘안’에 숨겨진 시스템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2147483647개의 갈림길에서 실패한 나를 보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2147483647명의 내가 죽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가 여기 있었다.


나는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여기서 떨어져야 했어.”


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너는 오직 2147483647명밖에 없으니까.”


“난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


“어차피 이건 예정된 오류였어. 어쩌면 네가 마음을 고치고 자살하지 않을 가능성도 물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응, 코드를 조금 수정해야겠네. 다시 #1부터 #2147483647까지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 이런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자. 다행히 지금까지의 기록은 외장하드에 기록해놨어.”


유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래, 어쩌면 또 다른 가능성이 2147483648번째 너를 다시 만들지도 몰라. 이건 직접 돌려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지. 원래 상자를 들여다보기 전까지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야.”


“도대체 왜 이런......,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내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유가 필요한 거야? 글쎄.......”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종료된 2147483647개의 세계들을 보았다.


“어차피 죽어버릴 거, 어디까지 살 수 있을까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 세상이 하얘졌다.






#1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결국 죽을 운명인 아이를 살리지 않고 죽게 놔둔다면....... 어차피 오류가 생길 프로그램 처음부터 돌리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우리 둘이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따뜻하고 끈적거리는 체액으로 머리카락이 흠뻑 젖는 것이 느껴졌다.


수진이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다음 루프로 넘어갔다.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