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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프롤로그, 보이 밋 걸.

천가을(千秋) 2018.06.23 21:55

내가 그날 그것을 본 건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학교 건물과 울타리 사이의 좁은 길목을 따라 걷다보면 조그마한 정원이 나온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엔 잡초도 무성하고 사람이 다녔던 길도 거의 흔적밖에 남지 않아, 사실상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가끔씩 몰래 담배 피는 불량 학생들이나 선생님들 몰래 은밀한 짓을 즐기는 못된 놈들 빼고는 여기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는 그런 학생들이 이해 안 갔다. 그곳은 가만히 서있어도 끈적거리는 잡초의 감촉과 발밑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냄새에 일초라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곳이었다. 담배를 피거나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그런 장소로 간다는 건, 그만큼 그들이 절박하다는 뜻일까. 모든 게 지루하고 싫증난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내가 정원으로 간 건 정말 우연일 뿐이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건지는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늦게 끝난 방과 후 교실에 지쳤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살벌한 붉은빛이 도는 하늘을 등지고서 나는 엉망진창 성적표를 한 손에 들고 교문과 정반대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정원으로 향하는 좁은 길이었다.


길은 내 기억보다도 훨씬 좁고 엉망진창이었다. 건물 벽에는 알 수 없는 낙서들이 마구 그려져 있었고, 학생들이 몰래 버린 쓰레기들은 작은 언덕을 이루며 곰팡이 냄새를 풍겼다. 손으로 코를 막고 찡그리면서,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잠시 울타리를 짚은 손바닥에 끈적거리는 점액이 묻었다. 옷에 쓱쓱 닦으면서 나는 드디어 버려진 정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곳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컴컴한 정원에 대비되는 새하얀 하복이 왠지 모르게 눈부시게 느껴졌다. 마치 달빛 아래 빛나는 털을 자랑하며 서있는 늑대 같았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와 새까만 눈동자는 싸늘하고 우아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짓도.......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우리 반의 인기 많은 여학생이었다. 지금 나는 그녀와 단둘이 정원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건 반쯤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게 우리 반 친구라고 해도, 누군가가 눈앞에서 모르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칼로 목을 깊숙이 가르는 장면을 본다면, 누구든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힐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기대감이었다. 이 앞으로 무언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재미없기만 한 공부, 잔소리만 하는 부모님, 이런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지금 어떤 이야기의 첫 페이지가 막 넘겨지려는 중이었다. 언제나 엑스트라 A에 불과했던 내가 드디어 주인공이 된 이야기가.


이건 운명이었다. 오늘따라 방과 후 수업이 늦게 끝난 것도, 이번 시험을 거하게 망쳐버린 것도, 나를 이 냄새 나는 정원으로 끌어들인 것도, 전부 운명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마 누군가가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살짝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저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지만 내 앞에 있는 건 겁에 질린 소녀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믿을 수 있는 파트너야. 나는 심호흡한 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오늘 본 건 모, 모른 척 해줄게. 나와 너, 두,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자.”


나는 덜덜 떨고 있는 손을 그녀에게 내밀며 나는 억지로 웃어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에 긴장이 풀리면서 그녀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웠다. 이것이 운명인가. 정각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야, 단순한 겁쟁이였잖아.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그녀는 순식간에 내게 다가와 그 날카로운 칼날을 내 목에 깊숙이 꿰뚫었다. 따뜻한 체액이 내 몸 안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잡초 위에 털썩 쓰러졌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가 삽을 꺼내는 게 느껴졌다.


“짐짝 같은 남자 조연 따위 필요 없다고. 주인공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니까.”


엑스트라A는 그렇게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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