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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XXX입니다.

당신이 이걸 읽고 계신다는 건, 이미 늦어버렸다는 거겠죠.

당신에게 이전부터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아마 재작년이었겠죠?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옥상 위에서요.

의사 선생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매일 같이 몰래 담배 피러 옥상에 올라오던 저는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성이 난간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당신이었어요. 저는 당신을 말리려고 했지요. 어떤 정의감이 솟은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제 눈 앞에서 사람이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 그날 잠자리가 찝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옥상에서 누가 떨어져서 폐쇄되면 제가 담배 필 곳도 사라지거든요.

제가 말리려고 다가가자 당신은 저에게 뒤돌아보며 말했죠.

"더 이상 살아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저는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누군가가 결심한 죽음을 미루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전 평범한 환자일 뿐이지, 상담사도 아니고요.

하지만 저는 이내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죠.

"당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내가 만들어주겠다,"라고.


그 다음 날부터 제가 옥상에 올라올 때마다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둘이 서로 나란히 옥상 위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가볍게 대화를 나눴어요.

이 병원의 죽이 더럽게 맛이 없다던가, 옆자리 할아버지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미칠 것 같다던가.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어줬습니다.

전 그런 당신이 좋았어요.

당신 옆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옥상 위 시원한 바람에 살랑거리는 당신의 갈색 단발머리도, 그럴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는 좋은 샴푸 냄새도.

당신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을 때는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어요.


그 동안 저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말 걸어본 적 없는 옆자리 할아버지와 조금씩 말이 트기 시작했어요.

이야기하면서 생각보다 좋은 할아버지시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코 고는 소리만 빼면요.

담배도 점점 줄이고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셨지만, 전 당신이 담배 연기가 풍길 때마다 코를 찡그리는 걸 봤어요.

그래서 당신 앞에서는 담배를 피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당신이랑 이야기할 때 담배 냄새 날까 봐 당신이 없을 때도 담배 피는 걸 자제했어요.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이었고, 저는 분명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민감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입원하게 된 건 교통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어요.

평소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저를 부모님께서 억지로라도 끌고 나와 등산하러 가는 길이었죠.

제 부모님이 참 열정적인 분들이십니다, 같이 있으면 정말 진 빠져요.

그날도 뭐가 그리 신 난 건지 두 분께서는 흥얼흥얼 노래 부르시면서 고속도로 위를 주행했습니다.

커다란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차선 바꾸다가 그대로 저희를 박아버리기 전까지는.

뉴스에도 꽤 크게 나오더라고요. 그 이후로도 몇 번 추돌 사고 생겨서 총 5중 추돌사고였다고.

사망자는 4명, 부상자는 10명.

그 4명 중 제 부모님들이 계셨습니다.

저도 아슬아슬했지만 가까스로 문턱을 넘진 못했어요.

대신 그때의 일 때문에 생긴 커다란 상처와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가게 됐습니다.

고모부는 그래도 조그마한 가능성을 놓지 않고 병원비를 부담하셨고, 저도 폐와 다른 장기들 수술을 거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머릿속의 문제는 어떻게 해도 고칠 수가 없었어요. 트라우마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실은, 저도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매일마다 그 난간 위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곤 했어요.

담배 따위는 모두 핑계에 불과했던 걸지도 몰라요.

참 웃기죠, 그런 녀석이 '당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게.

하지만 분명 그 만남은 운명적이었던 겁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다시 변했으니까요.


아직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셨나요?

저는 당신 덕분에 제가 살아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되잖아요? 아직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당신은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불안했어요.

난간 손잡이에 기대,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피우면서, 저는 당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당신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쉽진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당신의 얼굴이 전부였고, 당신이 중환자실에 계실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까요.

겨우 허락 받고 중환자실에 들어가 확인한 당신의 얼굴은 분명 제가 알고 있던 그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관계자 분들의 말로는 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커다란 교통사고 이후로 뇌 쪽을 크게 다쳐서 그런지 수시로 의식은 돌아오지만 아직 눈을 뜬 적은 없다고요.

그렇다면 제가 본 당신은 누구였을까요.


저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어요.

하나는 당신이 곧 커다란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수술에는 크게 망가져 버린 신장을 대체할 새로운 장기가 필요했죠.

또 다른 하나는 그 교통사고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아마 당신은 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 거에요.

당신 역시 그 5중추돌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이 바로 제 부모님을 덮친 커다란 트럭에 타고 계셨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치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머릿속이 뿌연 안개와도 같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전부 제 꿈이었던 걸까요?

모두 제 망상에 불과했던 걸까요?

하지만 전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 날들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저는 다시 옥상 위 난간에 기대보았습니다. 당신이 있던 그 자리에요.

그리고 저는 그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 확인했습니다.

혈액형이나 나이를 따져봤을 때 제 신장을 이식할 경우 수술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하네요.

역시 저희는 운명적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제 다른 신장이었어요. 한쪽은 멀쩡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인지 다른 신장이 과연 혼자서 제대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지 의사 선생님도 확신하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요.

그건, 달리 말하면, 가능성은 있다는 거죠?

당신을 만나면서 저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평소에는 미신 따위는 죽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 운명을 믿습니다.

유령도 믿습니다.

지금까지의 행복했던 날들은 없었던 일로 하기 싫으니까요.


이 편지는 만약 이 수술로 인해 제가 혼수 상태에 빠지거나 죽을 경우 당신에게 보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이라는 존재가 저에게 커다란 행복이었듯이, 당신의 마음속에도 저라는 존재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걸 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가주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아아, 당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저는 이제 와서야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늦었지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합니다.


p.s. 요즘은 죽이 꽤 맛있어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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