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단편 소설

둘만의 기억

천가을(千秋) 2017.02.03 21:47

"사람들은 사랑을 과대평가 하길 좋아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어느 카페 안, 한 커플이 서로 마주 보며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남성이 포크로 조각 낸 생크림 케이크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말하자 맞은편에 앉은 여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우리가 방금 본 영화 있잖아."

남성은 포크를 흔들면서 말했다.

"사랑의 힘으로 외계인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거 너무 과장 아니야?"

그 영화는 남성이 외계인에게 납치된 애인을 구하기 위해 당당히 전장에 나서서 인류를 구해낸다는 내용의 흔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였다. 분명 진부한 내용이긴 했지만 실감 나는 볼거리 때문에 눈이 심심하진 않았다는 게 여성의 개인적인 감상 평이었다.

여성은 입 안에서 케이크 조각을 우물우물 씹으며 물었다.

"글쎄, 그런가?"

"그래, 주인공의 행동은 너무나 무모했다고. 사랑만 믿고 나서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어."

"그럼 그런 리스크마저 견뎌내고 성공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해석은 어때?"

여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바보 같이 느껴졌다.

신 대신 사랑을 집어넣은 극단적 운명론적 해석이다.

"그 해석이 반드시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남성은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난 애초에 주인공이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를 할 수 없어."

여성이 창밖을 바라보자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이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봐도 똑같은 풍경, 이젠 질려서 보면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저 풍경을 매번 보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건 정상적인 사고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응, 아무리 주인공이 용감하다고는 해도 인간으로서 가지는 본능적 두려움이라는 게 있잖아."

방금 그것이 여성의 혼잣말인 줄 모르고 남성은 맞장구쳤다. 그리고 남성은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심리적 저울질이라던가, 자신을 구하러 와줄 거라는 믿음이 가져오는 역효과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남성이 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예전부터 삐딱한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여성은 남성의 그런 엉뚱한 점이 좋았다.

남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여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까?"

"무슨 이야기?"

"사랑의 힘에 대한 이야기."

여성은 후후 웃었다.

"방금 생각난 건데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의 지구.

그곳은 결코 지금처럼 평화롭지 않는 살벌한 곳이었다.

창밖의 일상적인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대신 두꺼운 철제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커다란 장비를 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커튼 사이로 매일같이 보였다. 그 갑옷은 마치 만화 영화에만 나올 법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왼쪽 가슴에 A라는 주홍색 글자가 찍혀있었으며 헬멧은 밖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은빛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가방처럼 메고 다니는 커다란 장비에 이어진 작은 소총처럼 생긴 장치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이 또 돌아다니고 있어."

키가 큰 남자가 커튼 사이를 훔쳐보며 방 안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란 바로 생각도둑이었다. 20년 뒤 세계는 이른바 생각 전쟁이었다. 누군가의 생각은 곧 정보고, 정보는 곧 돈이며, 돈은 곧 힘이다. 저 밖의 생각 도둑은 손에 쥐고 있는 뇌파수신기로 사람들의 생각과 기억을 복사, 삭제, 심지어 조작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뇌파수신기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벽에 철판을 층층이 겹쳐 놓은 베이스에 숨어 지내거나 철제 갑옷을 입는 수 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쉿, 기억까지 전부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야 돼."

방 한 구석에서 5살로 보이는 꼬마애를 달래주는 여성이 있었다. 둘은 모자관계다.

"엄마, 생각이 사라진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 생각을 했었다는 너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거야."

"그러면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무슨 뜻이야?"

"너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몇 년 간의 세월의 일부분이 사라진다는 거지."

"기억을 조작당한다는 건?"

엄마의 대답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한 후 꼬마를 품 안에 안으며 대답했다.

"네가 더 이상 네가 아니게 된단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렴."

"......응."

방 안의 사람들은 말 없이 둘의 모습을 보았다.

저 분의 남편은 예전에 기억을 조작 당해 현재 생각도둑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을 두려워하면서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부인은 지난 달에 아들을 데리고 급히 이 곳으로 피난 왔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이 자신을 다시 기억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때까지 자신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언젠가 술자리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역시 모두 각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부인에게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쓰디쓴 소주로 목구멍을 채웠었다.

키 큰 남자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이제 안 보여요. 다른 데로 갔나 보네요."

창밖에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오가던 도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숨긴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럼 갔다 올게."

키 큰 남자는 헬멧 쪽이 살짝 찌그러진 철제 갑옷을 입은 채 문 앞에서 말했다.

이 갑옷은 언젠가 이 베이스가 위치한 건물에 들어왔었던 생각도둑을 습격해 가까스로 제압하면서 얻은, 바깥 세상을 향한 단 하나의 열쇠였다.

식량과 생필품을 수집하기 위해 나가려는 남성을 갈색머리 여성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키 작은 그녀의 머리를 두툼한 철제 장갑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하지만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어."

"이건 내가 나서서 맡은 역할이야. 네 역할이 근식이랑 함께 기계를 관리하고 정비하는 것인 것처럼."

남성은 심호흡을 하며 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우리 모두에겐 배정된 역할이 있어. 모두가 그 역할에 충실해야 우린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옆에서 곱슬머리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요리사였던 그는 생각도둑 습격 작전 때 부상 당한 이후로 식품 조리 역할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이스에는 부상 당한 자들을 치료해주는 의대생 여성도 있으며, 최소한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청소부 아저씨도 있었다. 생각도둑이 건물 근처에 있는지 근처 CCTV를 통해 감시하는 모녀도 있었고, 문 근처에서 교대로 번갈아가며 보초를 서는 남녀 여섯 명도 있었다. 이곳에 불필요한 자는 없었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며 이 살벌하고 지옥 같은 곳에서 하루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여성은 문을 여는 남성에게 말했다.

"반드시 돌아와야 돼!"

"응, 약속할게. 반드시 돌아올 거야. 사랑해."

"나도."

철제 갑옷이 쿵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문이 끼익 닫혔다. 여성은 그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 후 문의 삼중 자물쇠를 잠갔다. 자물쇠가 찰칵 찰칵 잠기는 소리가 어째서일까 차갑고 날카롭게 들려와 그녀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이런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여성은 약지에 낀 결혼 반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가 죽는다면, 평생을 사랑하기로 약속한 그가 죽는다면, 정말 이 세상은 하루라도 더 살 가치가 있는 곳일까?




남성은 불편한 철제 갑옷을 질질 끌며 길을 건넜다.

저 멀리 철제 갑옷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것이 보였지만 남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꿋꿋하게 베이스 건너편의 백화점에 도착했다.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 지하 1층 식료품 코너가 눈앞에 펼쳐졌다. 몇 년 전 처음 생각도둑이 이 도시를 습격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어두컴컴한 지하 미로를 연상케 하는 지하 1층에서 남성은 항상 가던 통조림 코너를 향했다. 혼자 뿐인 지하 1층에 철제 갑옷이 철커덕 철커덕 소리를 낼 때마다 남성은 괜히 심장을 졸였다. 아무도 없는 백화점은 언제나 가도 낯설게 느껴졌다.

무사히 통조림 코너에 도착한 남성은 최대한 많이 고기 통조림을 쓸어 담아 근처에 있던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품 안에 통조림을 가득 안은 채 남성은 다시 발길을 돌려 아까 내려왔던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었다. 몇 분간 보지 못했던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지상에 올라온 남성은 화장품 진열대에 몸을 숨긴 채 창밖을 살펴보았다. 진뜩진뜩한 불쾌감이 땀구멍에서 흘러나와 금방이라도 족쇄 같은 철제 갑옷을 벗고 싶게 만들었다.

남성은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조급해봤자 이득이 되는 건 없었다.

이럴 땐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면서. 머릿속에서 지난 25년 동안 그녀와 함께했던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와의 첫 데이트를 떠올렸다. 맛도 없는 레스토랑에 바보 같은 영화까지 겹친 최악의 데이트 코스였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에게 웃어줬다. 그녀의 웃음은 그에게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 웃음을 보기 위해 그는 이미 버린 목숨과 같은 인생을 지금까지 몇 년이나 버텨왔다.

남성은 이를 악 물고 통조림을 끌어안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무거운 철제 갑옷에 통조림의 무게가 더해져 빨리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길거리에 나오니 태양빛에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남성은 자신의 옷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거운 몸을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남성은 길을 건넜다. 항상 건너던 횡단보도가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 남성은 잠시 통조림을 내려놓고 헬멧을 벗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맺힌 땀을 차갑게 식혀줬다. 남성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의 자유를 만끽한 후 다시 헬멧을 쓰기 위해 들어 올렸다.

그때 그는 자신의 뒤에서 묵직한 쇳소리를 들었다.

놀란 나머지 헬멧을 떨어뜨린 그는 비닐봉지를 들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온몸을 은색 갑옷으로 둔갑한 생각도둑. 뇌파수신기는 그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가슴팍의 주홍 A가 오늘따라 잔인하게 느껴졌다. 땀이 그의 눈에서 주르륵 흘러나와 턱끝에 맺혔다.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네."

그 다음엔 엄청난 노이즈가 그의 정신을 뒤덮고―




쿵.




문 쪽에서 무언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베이스 안 사람들은 모두 긴장했다. 다급해진 갈색머리 여성은 꼬마를 품에 안고 떨고 있는 부인에게 소리쳤다.

"CCTV 확인해봐요!"

"아, 알겠어요."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간 부인은 잠시 후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방에서 달려나왔다.

"그가 돌아왔어요!"

"확실해요?"

"네, 헬멧을 벗고 있어서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통조림도 가득 들고왔고."

"그럼, 빨리 열어야지."

젊어보이는 여성이 배고픈지 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갈색머리 여성이 그녀를 제제했다.

"잠깐만요, 헬멧을 벗고 있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분명 헬멧을 벗고 있었는데."

"그럼 혹시 생각도둑에게 당한 게 아닐까요?"

"하지만 통조림을 가져올 이유가 없잖아."

"그건 함정일 수도,"

"그만해요, 제발!"

부인이 소리치자 여성은 놀라 말을 멈췄다. 부인은 꼬마를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남편을 믿어봐요."

"하지만......."

"생각을 뺏긴 자들은 본사에서 정교 조작을 거치기 전까지는 1차원적 사고 밖에 가능하지 않아요. 통조림이 함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를 믿어요, 제발."

부인은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여성은 그런 부인의 모습에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마르는 입술만 계속 적셨다. 적막만 흐르는 베이스 안에서,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믿어봅시다."

그녀는 문 앞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문 손잡이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문을 천천히 열어보니 문에 기댄 채 쓰러져있는 그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마침내 문을 다 열자 그는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자 여성은 다급하게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코에서 미세한 공기흐름이 느껴졌다. 철제 갑옷을 해체하고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대니 콩콩콩콩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아있어요."

참고 있었던 감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쓰러져있는 그를 껴안으며 흐느끼는 여성을 다른 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각자 자신들이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을 마음 속에서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후에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는 그를 철제 갑옷에서 완전히 꺼낸 후 가장 넓은 공간으로 끌고와 눕혔다. 남성은 여전히 눈 뜰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여성은 남성의 턱선을 어루만지며 눈 감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 아까 전에 먼저 나서서 문 열려고 했던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여기 통조림들 좀 보세요!"

그녀의 말에 모여든 사람들은 봉지 속에 든 통조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 이건......."

청소부 아저씨가 통조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쪽 면이 새까맣게 그을려져 모양이 마치 흘러내리다 만 슬라임처럼 변해있었다. 쓰러져 있는 남성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여성은 순간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에서 반짝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장비들을 챙긴 후 사람들을 밀쳐내며 곧바로 현관으로 달려가 철제 갑옷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같이 기계 정비를 맡고 있는 근식이가 물어봤지만 여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갑옷 등 뒤에 달린 커다란 장치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떼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접합면을 찾은 그녀는 곧바로 그 부분을 따라 조심스럽게 기기를 갑옷에서 떼어내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면서 여성은 정신 없는 머릿속을 가라앉히고 근식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쟤는 머릿속이 대부분 삭제된 상태일 지도 몰라. 헬멧을 벗은 상태에서 당한 거야."

"뭐라고?"

근식이는 놀랐다.

"쟤는 여기까지 통조림을 들고 왔잖아!"

"그래, 아마 본능적으로 뇌파수신기를 들고 있던 통조림으로 막으려고 했겠지. 공교롭게도 통조림의 스틸캔이 마치 헬멧과 같은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최소한의 기억과 생각은 보존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통조림을 여기까지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만이 남아 마치 단순 작업 로봇처럼 여기까지 간신히 들고 온 거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하지만 그것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고!"

여성이 소리 지르며 뒤돌아보자 근식이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두 눈에서 쉴 틈 없이 흘러나오는 절박함이 바닥에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근식이는 그제야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저 녀석의 머릿속을 읽을 거야?"

여성은 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기기를 떼어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근식이도 말 없이 그녀의 작업을 도와줬다.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젊은 남성이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의 생각을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옆에 서 있던 다른 녀석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갑옷에서 떼어낸 기기를 자신의 컴퓨터에 연결한 후 뇌파수신기를 해체해 센서에 전극을 붙여 쓰러져 있는 남성의 이마에 붙였다. 마치 1분 1초가 위험한 환자를 대하는 의사 같은 모습이었다. 의대생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괜찮겠어요? 이게 만약 안 된다면......."

여성은 의대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잘못된다면 아마 남성은 남아있는 최소한의 기억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은 멈추지 않았다. 의대생도 그녀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느새 장치는 완성되었다.

이제 엔터키만 누르면 남성의 머릿속은 전부 컴퓨터의 화면 속에 스캔되어 나온다. 엔터를 향한 손가락이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그녀는 이를 꽉 물고 키를 눌렀다. 동시에 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장치에 녹색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흑색 뿐인 모니터에 녹색 문자열이 한줄 한줄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문자열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드문드문 등장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들이 내 생각을 읽는다면...... 베이스의 위치가 들통......'

'......라면 분명...... 내 생각을 읽겠지...... 얼른 도망쳐......'

"이건 설마."

옆에서 지켜보던 근식이는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은 저 남성이 생각을 잃기 직전까지 희박한 가능성에 도박을 걸고 자기 자신에게 수백 번 수천 번 암시한 내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생각을 뺏기고 나서도 그녀를 믿고 있었고, 걱정하고 있었다. 근식이는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마 그들은 분명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될 거에요. 그들이 저 녀석의 생각을 본사에 가져가 해석하기 전까지 베이스를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어요. 지금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근식이는 이 광경을 구경하고만 있는 사람들을 재촉하며 자리를 옮기게 했다. 어쩌면 그건 그녀에 대한 배려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스크롤을 내려 더 확인해보았다. 거기에는 남성이 끝까지 지키고 싶어했던 기억들의 파편들이 있었다. 같이 해외여행 갔었던 기억, 제주도에 갔다가 날씨 때문에 며칠이나 공항에서 갇혀 지냈던 기억, 처음으로 각자의 부모님과 인사 드렸던 기억.

그 마지막에는 그녀와 그의 첫 데이트의 기억이 있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그와 그녀의 소중한 기억.

"전부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여성은 손가락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째서 그 기억들에는 전부 내가 없는 거야......."

그 기억에서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깨져서 읽을 수 없는 문자열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짐 싸는 걸 도와주다가 다시 돌아온 근식이는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녀석은 지금 예전의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어.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없었어."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남성의 이마에 연결한 센서에 다가갔다.

"기억의 빈 자리는 거짓 기억이나 다름 없어. 나와의 기억에 내가 없다면, 그의 머리는 더 이상 그 기억을 보존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잊어버리겠지. 그렇게 되면 정말로 끝이야. 그래선 안 돼."

여성은 센서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전선을 살펴보더니 거기에도 전극을 달기 시작했다. 근식이는 곧바로 그녀가 하려는 짓을 깨달았다.

"아니야, 안 돼, 그건 정말 위험한 짓이야. 자칫하면 네 두뇌마저 맛이 가버린다고."

"하지만 저 기억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죽을 수도 있다니까? 이건 너무 무모한 도전이야."

"쟤와 함께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녀는 마침내 완성한 전극을 근식이에게 넘겼다.

"나를 쟤의 기억 속에 접속시켜줘."

"아니야, 난 못해, 할 수 없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이때 젊은 남성이 방에서 나오더니 여성에게 비아냥거렸다.

"지금 아줌마가 이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돼, 베이스 옮길 때 이 무거운 몸뚱아리 두 개를 같이 옮겨야하는 거야?"

여성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근식이에게 뻗은 두 팔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근식이는 그 두 팔을 다시 잡고 전극을 받았다.

"너희 둘은 내가 책임질게."

그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살짝 보였지만, 그가 내뱉은 말이 그가 어렵게 내린 굳은 결심이라는 것이 그녀도 진심에 닿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등장한 부인도 거들었다.

"소중한 사람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잘 알아요. 만약 서로 사랑하는 둘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겠죠. 저는 당신의 결정에 존중할게요.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괜찮아요."

그녀는 살짝 망설였지만 심호흡을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를 사랑하니까요."






"......흥미로운 이야기야."

남성은 케이크를 입안 가득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절실함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구나. 응응,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거 무슨 소설에서 나온 거야?"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여성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지만 남성은 그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앞으로 이 반복되는 기억 속에서 얼마나 살아야하는 걸까, 언제나 봐도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여성은 생각했다. 그녀는 시선을 맞은편의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그녀와 자신이 이 시간을 몇 번째 반복하는 건지 알고 저런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알 리가 없지.

하지만 상관 없다.

이대로 둘이 평생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살벌한 미래로부터 벗어나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그녀가 꿈 꾸던 행복일 것이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도 씨익 웃었다.

난 이렇게 몇 천만 번이라도 살아갈 수 있어.

생크림 묻은 검지로 장난스럽게 남성의 코를 누르며 여성이 웃었다.

"역시 넌 사랑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쳐다보는 이천 개의 눈알  (0) 2017.02.12
한겨울의 고백  (0) 2017.02.09
둘만의 기억  (0) 2017.02.03
이른 새벽의 손님  (0) 2017.01.28
홍차, 머스켓, 그리고 고양이  (0) 2017.01.26
빙하, 여고생, 그리고 문 앞의 늑대  (0) 2017.01.13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