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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일상

난 괜찮지 않다.

천가을(千秋) 2017.03.20 22:24

오늘도 나쁜 꿈을 꿨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책상을 향해 달려간다. 충전기에 꽂힌 핸드폰 화면이 팟 켜진다.

"4: 58"

그제야 나는 헉헉 가쁜 숨을 고르며 아직도 쿵쾅쿵쾅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식은땀으로 푹 젖은 셔츠등의 끈적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확히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었다. 그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직전, "지각했다!"는 외침을 꿈 속에서 들었던 것. 다행히 그건 단지 꿈일 뿐이었지만.......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질질 끌고 다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최근 이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갑자기 바빠진 일상, 밀릴 대로 밀린 업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하는 암시와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은 노트북이 한 번 죽어서 사라졌지만, 1학년 때는 30분 단위로 한 달 플래너를 엑셀로 정리하고 수시로 관리하는 게 내 일상이자 보람이었다.

입시 끝난 고3이라는 휴식기를 거치고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첫 주는 오리엔테이션 뿐이었기 때문에 슬슬 놀아도 괜찮았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들이 내 18학점 2AU 시간표 보고 기겁하기도 했지만, 설마 그 정도겠어라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의심했고, 한편으로는 첫 학기에는 이렇게 힘들게 들으면 나중에 편하게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전략도 있었다.

본래 취미였던 소설 쓰기에도 열중했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만든 웹소설 플랫폼 브릿G라가 오픈베타 중이라길래 나는 그곳에서 중단편 소설을 꾸준히 올려보려고 했다. 그렇게 올린 단편 소설이 어쩌다보니 주목을 받고 모르는 사이에 나는 브릿G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작가가 된 모양이었다. 이전까지는 방문자가 거의 없는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단편을 올렸기 때문에 이 정도로 주목 받으니 기분이 너무 설렜다.

고등학생 때는 엄두도 못 냈을 동아리도 들어갔다. 우선 매주 화요일 밤마다 모이는 문학 동아리에 들어갔다. 매주 목요일에 2시간 정도, 일요일에 1시간 정도 모이며, 그 외에도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 작곡 동아리도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만난 아마추어 작곡가들과 친해지면서 작곡에 대한 모종의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얼른 곡 하나라도 작곡할 수 있지"라며 오히려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화상을 입히는 불이었다.


나는 이틀 전, 그러니까 토요일에 MT를 갔다 왔다. 그 전날에는 고등학교 동문 선배들과 함께 한 술자리가 있었다. 살살 마시려고 했는데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와 "잘 마시네"라는 칭찬에 그만 또 불타오르고 말았다. 3차까지 가서 나는 사장님이 "이거 마시면 훅간다"는 칵테일 하나 마시고 바로 쓰러졌다. (다행히 다시 깨어나 기숙사에는 자기 발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MT날 밤에 또 다시 불타올랐다. 마시고, 마시다, 잠시 쉬고, 라면 먹으러 다시 나왔다가 또 마시고, 잔뜩 마시고, 어느샌가 나는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새벽 5시쯤에 깨어났다. 안 좋은 자세로 자고 있었던 건지 오른팔에 피가 전혀 통하지 않아 무감각했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팔과 함께 거실로 나와보니 아직도 살아남은 여섯 명끼리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화장실에서는 누군가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와주러 가야할 것 같은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내 몸이 미웠다. 내 팔 탓으로 돌리는 자기 자신이 한심했다. 다시 잘까 했지만 이미 잠은 깨버렸고 아픈 팔 때문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날 그대로 밤을 새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목도 부었고, 속도 안 좋다. 구강 안쪽이 따갑다. 사지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자주 몸이 휘청거린다. 물론 병원에 가면 될 일이지만, 오늘 나는 일반화학 퀴즈가 있었고, 아직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금요일에는 미적분학 퀴즈가 있었고, 목요일까지 일반물리학 실험 보고서가 있었고,  화요일까지는 인간과 기계 페이퍼가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는 내가 과제와 퀴즈를 벼락치기 식으로 해결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저번 주 화요일에는 밤늦게 문학동아리 모임이 있었다. 그 이후에는 간단한 술자리를 (또) 가졌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이상하게 술자리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일이 있었던 다음 날 밤, 놀랍게도 나는 9시 수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시 20분에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이미 지각한 20분을 어떻게 되돌리겠는가. 그건 나에게 상당히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날 9시 수업 전에 일반물리학실험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그것도 손으로! 어떻게든 써보려고 노력했지만 수요일은 오후 7시에도 수업이 있던 날이었으며, 하필이면 그날엔 무려 3시간이나 수업을 했다.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를 봤기 때문에 후회하진 않는다, 굉장히 유익한 수업이었다. 여러분도 한 번씩은 보기를 권한다.) 결국 나는 일반물리학실험 보고서를 새벽 3시 반에 완성했으며, 지금 자면 다음 날 또 지각할 것임을 직감했다. 일반물리학실험은 한 번 지각하면 점수가 10점이나 깎이기 때문에 선배들도 지각할 바에는 드랍하라고 조언하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기껏 밤 새서 다 쓴 보고서를 못 내고 드랍할 수는 없지 않는가! 결국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먼 길을 걸어 일반물리학실험 수업이 열리는 궁리실험동 건물의 소파 위에서 파카를 덮고 잤다. 난방 시설이 없는 덕분에 아침 7시에 깰 수 있었지만 1시간동안은 얼어버린 팔다리, 그리고 정신을 완전히 녹이는데 써야했다.

아마 이런 지각에 대한 트라우마가 오늘 꿨던 꿈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그래,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브릿G에 소설을 쓰면서 나는 점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됐다. 자기만족에서 그쳤던 글쓰기가 점점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작업이 되었다. 그것은 어떤 리뷰어에게 호되게 까이면서 더욱 심해졌다. 캐릭터의 죽음을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읽기 쉬운 글을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쓰려는 집착은 점점 더 커져 오히려 나를 글 쓰기 힘들게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하루에 한 편씩은 공장처럼 찍어냈었는데, 이젠 소재를 겨우 하나 떠올려도 그걸 텍스트로 구현하기가 어려웠다. 쓰다보면 어느새 이건 아니라며 지워버리는 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저번 주 목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오전의 일반화학실험 수업이 일찍 끝나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갑자기 몰려온 피로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안 좋은 꿈을 꿨다. 꽤 오랫동안 꿨다고 생각했는데 벌떡 일어나 시계를 확인해보니 10분 밖에 안 지나있었다. 악몽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계속 메아리치던 말들이 있었다.

"제목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첫 문장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마다 하는 고민이었다. 그것이 이제 꿈 속에서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두 문장은 계속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나는 그날 마치 홀린듯이 단편 하나를 완성했다. 그것은 좋은 글을 쓰고 싶어 도리어 아무 것도 쓸 수 없게 된 나의 비명과 같은 단편이었다.


나는 무서워졌다.

이전까지는 뭉게뭉게 안개와 같았던 나의 고민들이 내 머릿속에서 서서히 또 하나의 인격으로 커지면서 나를 덥석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될 것만 같아 무서웠다. 몸도 알코올에 취해 삐걱삐걱 망가지고 있었다. 망가진 그릇엔 망가진 영혼이 담기는 법이었다. 마치 밑빠진 독처럼, 계속 영혼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버리는 나날들이었다.


대학교 와서도 나는 부모님과 싸웠다.

동아리 활동, 과제, 퀴즈, 수업, 모든 게 날 괴롭힐 수록 내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일반물리학실험 보고서를 완성해야했던 수요일 밤,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과 통화했지만 아직 보고서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 빨리 끊으라고 재촉했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통화했음에도 짜증만 내는 내 태도에 화가 났고 결국 목소리를 높여가며 다퉜다. 지나고보면 내가 잘못한 일이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부모님은 내게 그렇게 피곤하게 살 거면 동아리도 때려치우고 수업도 드랍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오히려 오기 부리고 싶게 만들었다. 우매한 자의 자존심 높이기에 불과했지만, 나는 "괜찮아, 다 할 수 있어!"라고 큰 소리 떵떵 쳤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불안하다.

나는 정말 괜찮은가?

지금 나는 정말 괜찮은 상태인가?

나 자신을 제일 잘 아는 건 나인 게 분명한데, 괜찮다고 큰 소리 치는 나를 주변 사람들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 잘못된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는 내일 자정까지 완성해야 하는 일반화학실험 보고서와 3일 후 오전까지 완성해야 하는 일반물리학실험 보고서가 남아있다. 하지만 잠시는 이런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나는 너무 불타올랐다. 나답지 않게.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내 안의 고민을 글로 쓰게 되면 그것이 조금은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 애매한 형태의 안개로 있었던 고민들이 텍스트로 구체화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나 나름대로 추측해보고 있다. 이런 괴물이 내 안에 있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이제부터 고민해보면 된다. 고민할 시간이 없지만, 그것도 고민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

조금의 휴식시간 덕분에 아직은 좀 더 불타오를 수 있다.

작곡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해서 얼른 곡 하나를 작곡해보고 싶고, 수업도 힘든 거 참고 지금 18학점 2AU 다 들어서 나중에 편하게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다. 그러니까 조금은 더 불타올라야 한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도망칠 수 있는 안락처를 찾아야겠지. 소설 쓰기는 이미 내 안에서 취미가 아닌 무언가로 변한지 오래다. 아, 이런, 나 스스로 과제를 주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 이 과제를 해결하면, 난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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