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장의 살인(屍人荘の殺人)]
아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좀비가 나온다면서 결코 단순한 추리물이 아님을 자꾸 홍보하길래 응 그래 한번 읽어볼까 고민하다 깜빡 잊어버렸던 책, 갑자기 오늘 생각나서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일본에서 5관왕한 추리소설이라 해서 기대감 품고 읽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많이 실망스러웠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기존의 추리소설을 까고 있으면서 자신 스스로도 그와 별 다를바 없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는 추리소설 애호가 둘이서 주변인을 보고 맞추는 내기를 하면서 시작하는데, 둘의 추리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간다. 누가 봐도 이전 추리물에 등장하는 탐정의 풍자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전 추리물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 작가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소재인 "밀실살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던가. (사실 이건 너무 흔한 이야기라 별 감흥도 못 느꼈다.) 혹은 소설 속 탐정이 얼마나 '특등석' 취급을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예를 들어 맨날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정작 탐정 본인은 자동으로 생존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는 그런.) 하지만 결국 스스로도 그런 추리소설의 한계를 담습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비판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렇다면 그 비판들은 무엇이 되는가? 단지 작가 본인이 이만큼 추리물을 잘 알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인가? 결국 트릭과 연출을 위해 개연성을 포기한 건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좀 습격으로 등장인물 여럿이 리타이어 한 것도 어이 없었다. 추리소설의 한계점으로 꼽히는 요소 중 하나로 "장치로써 다뤄지는 인물"도 있지 않던가? 제대로 된 서사도 없이 인물들을 희생시켜버린 것이다. 작가는 나름 반전 요소로 넣은 것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작가가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도저히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캐릭터에 대한 모독으로까지 느꼈다. 말 그대로 캐릭터의 낭비였다.
물론 책을 읽는내내 그 정도로 끔찍했던 건 아니었다. 어쨌든 좀비와 추리의 결합은 신선했다. 추리에 오컬트적 요소를 넣는 시도야 흔하지만, 이 책은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추리물이지만, 동시에 좀비물로서의 성격도 갖춘 것이다. 그것도 꽤 조화로운 조합.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추리와 좀비라는 시도 하나로 5관왕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누가 뭐라해도 5관왕을 한 추리소설인 것이다.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매력적인 탐정이 등장해, 멋진 추리로 범인을 밝혀낸다. 거기에 좀비가 등장한다. 밀실살인게임 시리즈와 비교하면 백배는 더 읽을 가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밀실살인게임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본격적으로 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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