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적 잭(詩的私的ジャック)]
모리 히로시 지음
모든 것이 F가 된다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시적 사적 잭"은 아마 이 시리즈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동기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그걸 넘어 미스터리 장르 자체에 대한 어떤 도전처럼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시적 사적 잭"은, 다른 미스터리와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려는 시도가 노골적일 정도로 보이는 작품이었다.
첫째로, 살인 트릭이다. 작중에서 나오는 밀실 트릭은 전공 지식이 없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트릭이다. 무슨 느낌이냐면, 어떤 범인이 CCTV에 찍히지 않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던 방법이 실은 그 연구소에서 개발중인 투명 망토 덕분이었다는 황당한 전개. 비슷한 예시는 아니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그만큼 작중에서 언급되는 밀실트릭 자체가 일반적인 미스터리 소설에선 금기 취급 받을 그런 방법. 그러나 그것들이 시적 사적 잭에선 태연하게 등장한다. 오히려 "문제는 어떻게 밀실을 만들었나보다 뭘 위해 만들었나"란 말을 하면서. 그것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 있겠지.
(참고로 투명 망토 예시는 실제로 내가 예전에 읽었던 어떤 미스터리 소설에서 나온 살인 트릭이었다. 그러나 '시적 사적 잭'과는 달리 이런 역발상이 얄팍하게 사용되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던, 개인적으로 최악으로 꼽는 그런 미스터리 책 중 하나였다.)
둘째로, 탐정의 태도다. 만약 책 마지막에서 범인을 밝혀내고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는 인물을 탐정이라고 부른다면, 작중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은 사이카와 교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작 사이카와는 살인사건 해결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오히려 조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니시노소노 모에가 그 '호기심'을 대신하며, 그 사건에 대한 호기심과 집착으로 사이카와를 사건에 묶어두는 역할을 해준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직접 뛰어다니는 건 모에다. 사이카와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일본을 뒤로 하고 홀로 중국으로 출장까지 간다.
(생각해보면 모에를 단순히 '조수'라고 부르기엔 그녀의 능력치가 너무 뛰어나다. 단순히 그녀의 재력이나 인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에 자체도 작품 속에서 엄연히 한 명의 탐정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이번에는 결국 사이카와의 추리를 듣기 전에 사건의 진상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예를 들어 '차가운 박사의 밀실들'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거의 다 파악해내기도 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가장 적극적으로 사건에 휘말렸던 건 모에였다. 총에 맞을 뻔하고, 인질이 되어 목에 칼도 대고, 이번에는 범인의 다음 피해자가 되기 직전에 구해진다...)
셋째로, 살인 동기다. 사이카와 교수는 동기에 관심도 없으며, 설령 알게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태도를 보인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만약 살인 동기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을 정도면 타인을 죽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카와의 그런 태도는 비단 살인 동기에서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이카와는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한다. 각각의 동기와 상황은 본인만이 알 것이고, 자신은 단지 추측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사이카와의 이런 '거리두기'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전부터 계속 꾸준히 한 이야기지만, 이런 살인 동기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작가의 실력이나 개성 탓이 아니라 이 시리즈가 가진 정체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리즈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천재)들' '바깥과 고립된 공간(밀실)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천재들, 혹은 범인의 동기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을 사이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독자들은 지금까지 추리소설들을 읽으면서, 이후 범인의 어쩔 수 없는 살해 동기나 미학이 밝혀지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심지어 공감까지 시도한다. 그것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S&M 시리즈의 여러 후기들을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작품들에 나오는 동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음에 깜짤 놀랐었다. 추리소설에서 동기에 집착하는 독자들... 물론 살인 동기도 추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인 트릭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해답이 주어졌음에도 "동기가 설득력 있지 않다"며 책을 까내리는 평들. 그 "살인자의 동기를 반드시 이해 해야겠다"는 그 심리를 난 이해하기 어려웠다.
추리 소설에서 살인 동기는, 비유하자면 SF 소설에서 과학적 고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SF에서 고증은 중요할 수 있어도 결코 그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SF의 진가는 그 살짝 비껴난 곳에서 올 지도 모른다. 고증은 단지 설득력을 부여하는 부가요소일 뿐이다. (물론 전부 내 주관적인 감상이다.)
마찬가지다. 특히나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은 본격 추리소설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발한 살인 트릭과 그 논리적 해설이며, 살인 동기는 독자에게 설득력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동기를 찾고있는 여러분, 그리고 거기에 실망해 책 자체를 까내리는 여러분을 난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은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고수해왔고 거기에 대해서 꽤나 납득할 수 있는 이유들을 제시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어째서 '모리 히로시가 히가시노 게이고보다 미치지 못했다' 같은 평을 내가 읽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쩔 수 없는 살인자를 동정하고 살인에 둘러싼 사회적 부조리에 동감하고 싶은 거라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탐정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결국 내 개인적인 추리소설 감상법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본격 추리에세도 인간미다운 드라마를 기대하며 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괜히 중식 맛집에 와서 반찬으로 나오는 단무지가 맛 없다고 별 한 개 주는 사람들이 문득 겹쳐보였을 뿐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게 많은 책이었다. 작품 해설을 쓴 긴 사토코는 이 시리즈 자체가 미스터리에 대한 하나의 비평이자 메타픽션이라 지적했다. 내가 아직 미스터리 장르를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정말로 그 설명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덕질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지 않는 수학자: 기발한 발상과 그 중심의 거대한 회전축 (0) | 2019.02.15 |
---|---|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탐정은 독자 대신 사고해준다 (0) | 2019.02.11 |
모든 것이 F가 된다: 강렬하게 시작하는 천재의 이야기 (0) | 2019.02.11 |
디렉터스컷: 우타노 쇼고가 또 해낸 것 같다 (안좋은 의미로) (0) | 2018.11.17 |
시인장의 살인: 좀비와 추리, 그리고 엄청난 허세 (0) | 2018.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