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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책

모든 것이 F가 된다: 강렬하게 시작하는 천재의 이야기

[모든 것이 F가 된다(すべてがFになる)]

모리 히로시 지음





사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3년 전이었을 것이다. 한참 공부하기 싫을 때였기 때문에 추리소설을 이것저것 읽어보던 적이 있었다. 딱히 추리소설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깊이 빠져있던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걸 읽으면서 "우와 추리소설 재미있다~" 하던 시절이었다. 추리소설의 탈을 쓴,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영양가 없는 그런 책이나 읽었다. (고전부 시리즈와 헛소리 시리즈를 읽으며 스스로를 추리 마니아라고 부르던 부끄러운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친구들이 나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책이 바로 '모든 것이 F가 된다'였다. 그런거 읽지 말고 "진짜 추리소설"을 읽으라는 친구의 조언. 


농담이고 당연히 F 받으라고 준 선물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론 내가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최고로 꼽히는 선물이 되었다. 덕분에 모리 히로시란 작가를 알게 되었고, 좀더 진지하게 추리소설을 찾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내가 학점 F 받을 리는 당연히 없다. 으음. 국사는 조금 위험했어.


앗 서론이 많이 길어져버렸네.


아무튼 3년만에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다시 읽었고, 역시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 엄청난 책이었다. 모리 히로시는 천재다.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핵심은 천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이어지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가타 시키는 앞으로 등장할 수많은 천재들 사이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말하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만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런 비현실저깅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다. 정말로 있을 법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분명 천재다.


그것이 이 작품의 첫 번째 특징이다. 바로 살아 움직이는 천재.


모리 히로시가 그리는 천재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다. 그건 작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통찰력 덕분이라고 나는 나름 생각해본다. 만약 그의 머릿속에서 이토록 생생한 천재가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을 담고 있는 작가 본인도 어느 경지까지는 도달해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천재, 혹은 그와 비슷하게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존재는 다른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이 천재가 아닌 이상 그런 캐릭터를 바로 만들어내는 건 힘들고, 따라서 작가들은 주변인의 지능을 낮추거나 천재 캐릭터의 재능을 비상식적으로 높이는 등의 편법을 쓰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현실적인 억지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등장인물들의 "어이어이 대단하잖아!" 따위의 대사에 이입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천재는 말그대로 천재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마가타 시키는 어설프게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잉 아니라, 정말 하나의 완성된 천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 또한 작가의 훌륭한 편법이고 나는 보기좋게 거기에 넘어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놓고 보이는 편법보다야 나쁘겠는가. 그런 편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분명 다른 보통 작가보다는 수준이 다른 거겠지. 그리고 후속권을 읽어보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이 작가는 확실히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천재들뿐만 아니다. 모리 히로시가 그리는 이공계 인물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누군가가 이 작품에 대해서 인물들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 역시 공대에 다니는 학부생이라 잘 아는데, 이게 바로 이공계 사람들이다. 그냥 이공계 사람들이 진짜 머리가 이상할 뿐이다. 사이카와 교수와 그의 학생들의 언행에서 툭 툭 던져지는 이공계 디테일에서 피식 웃어버리곤 했다. 사이카와 교수가 내뱉는 이상한 표현들도 소소한 재미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사건을 접근하는 방식이다.


사이카와와 모에는 경계 조건을 확인하고 살인 트릭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 거기에서 모순을 발견하면 가설을 고치거나 새로 세운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면 가설을 수정한다. 마침내 논리적으로 가능한 해, 그중에서도 가장 안정된 해를 찾아낸다. 여기에 인물의 행동원리나 심리적 동기는 부차적 요소다. 그것은 이공계 접근방식 바깥의 영역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들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흔히 이공계 미스터리라고 불린다. 그건 단순히 이공계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이공계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추리 소설이다. 그것도 걸작 추리 소설 시리즈를 여는 첫 번째 작품이다.


그 작품의 배경은 어느 섬에 위치한 오버 테크놀로지 연구소. 그 지하에서 일생 갇혀 살고있던 박사의 시체가 어느날 문을 열고 웨딩 드레스 차림으로 로봇에 싣겨 등장한다. 이것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상상할 때마다 소름이 자꾸 돋는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밀실살인 사건인데, 거기에 감춰진 진상은 더더욱 충격적이다. 분명 3년 전에 똑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후반부에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부분은 소름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사건 그 자체의 강렬함.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본래 5부작 중 네 번째 작품으로 완성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집부의 요청으로 가장 처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실 이후 작품들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지만, 이 작품이 2 3 4 1 5의 순서였어도 나름대로 잘 짜여진 구성이 됐을 것이다. (특히 사이카와와 모에 사이의 관계 발전 면에서 보면.) 그럼에도 이 작품을 가장 처음으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그 자체로 충격적인 작품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제목부터 상당히 강렬하잖아.)


그렇다고 단순히 사건이 화제성만 짙은 그런 건 아니다. 작중에서 던져지는 컨셉이나 이미지와도 적절히 잘 섞여있으며, 그 본질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천재, 트로의 목마, 고독, 자유. 모든 것이 정교한 퍼즐처럼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읽어도 정말 짜릿한 책이었다! 겨울방학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최근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책을 읽어본 적도 별로 없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이어질 아홉 권의 책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리고 이번 기회로 느낀 것이 있다면, 추리 소설은 두 번 이상 읽어봐야 한다.


좋은 추리 소설은 두 번 이상 읽게 되어있다.